신랑이 늦둥이라
저와 나이차가 50 년 넘게 나시는 어머님..
저 시집오고 5 년만에 치매에 걸리셔서
저혼자 4 년간 똥오줌 받아내고,잘 씻지도 못하고,
딸내미 얼굴도 못보고, 매일 환자식 먹고,
간이침대에 쪼그려 잠들고,
4 년간 남편품에 단 한번도 잠들지 못했고,
힘이 없으셔서 변을 못누실땐
제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거의 매일이었지만 안힘들다고,
평생 이짓 해도 좋으니 살아만 계시라고
할수 있었던 이유는 정신이 멀쩡하셨던
그 5년간 베풀어주신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제나이 33살 먹도록 그렇게 선하고
지혜롭고 어진 이를 본적이 없습니다.

알콜중독으로 정신치료를 받고 계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제가 10살때 집나가서 소식없는 엄마..
상습절도로 경찰서 들락날락 하던 오빠..
그밑에서 매일 맞고..울며 자란 저를
무슨 공주님인줄 착각하는 신랑과
신랑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 글썽이며 한시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다고
2천만원짜리 통장을 내어주시며,
어디 나라에서는 남의집 귀한딸 데리고 올때
소팔고 집팔아 지참금 주고 데려 온다는데
부족하지만 받으라고...

그돈으로 하고싶은 혼수,
사고싶은거 사서 시집오라 하셨던 어머님...
부모 정 모르고 큰 저는 그런 어머님께 반해,
신랑이 독립해 살고있던 아파트 일부러 처분하고
어머님댁 들어가서 셋이 살게 되었습니다.

신랑 10살도 되기 전에 과부 되어,
자식 다섯을 키우시면서도 평생을 자식들에게조차
언성 한번 높이신 적이 없다는 어머님...
50 넘은 아주버님께서
평생 어머니 화내시는걸 본적이 없다 하시네요.

바쁜 명절날 돕진 못할망정
튀김 위에 설탕병을 깨트려 튀김도 다 망치고
병도 깬 저에게 1초도 망설임 없이
"아무소리 말고 있거라" 하시고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며
당신이 손에 힘이 없어 놓쳤다고 하시던 어머님...

단거 몸에 안좋다고 초콜렛 쩝쩝 먹고있는
제 등짝을 때리시면서도 나갔다 들어오실땐
군것질거리 꼭 사들고 "공주야~ 엄마 왔다~"
하시던 어머님..

어머님과 신랑과 저. 셋이 삼겹살에 소주 마시다
셋다 술이 과했는지 안하던 속마음 얘기 하다가,
자라온 서러움이 너무 많았던 저는
시어머니앞에서 꺼이꺼이 울며 술주정을 했는데,,,

그런 황당한 며느리를 혼내긴 커녕
제 손을 잡으며, 저보다 더 서럽게 우시며,
얼마나 서러웠노,, 얼마나 무서웠노..
처음부터 니가 내딸로 태어났음 오죽 좋았겠나,,
내가 더 잘해줄테니 이제 잊어라..잊어라...
하시던 어머님...

명절이나 손님 맞을때 상차린거 치우려면
"아직 다 안먹었다 방에 가있어라"하시곤
소리 안나게 살금 살금 그릇 치우고
설겆이 하시려다 저에게 들켜 서로 니가 왜 하니,
어머님이 왜 하세요 실랑이 하게 됐었죠...

제가 무슨 그리 귀한 몸이라고..
일 시키기 그저 아까우셔서 벌벌 떠시던 어머님.
치매에 걸려 본인 이름도 나이도 모르시면서도
험한 말씨 한번 안쓰시고
그저 곱고 귀여운 어린 아이가 되신 어머님...

어느날 저에게 " 아이고 이쁘네~
뉘집 딸이고~~" 하시더이다.
그래서 저 웃으면서
"나는 정순X여사님(시어머님 함자십니다)딸이지요~
할머니는 딸 있어요~?" 했더니 "있지~~
서미X(제이름)이 우리 막내딸~ 위로
아들 둘이랑 딸 서이도 있다~"
그때서야 펑펑 울며 깨달았습니다.

이분 마음속엔 제가,
딸같은 며느리가 아니라
막내시누 다음으로 또 하나 낳은 딸이었다는걸...
저에게... "니가 내 제일 아픈 손가락이다"
하시던 말씀이 진짜였다는걸...

정신 있으실때, 어머님께 저는
항상 감사하고 사랑하고 잘하려 노력은 했지만
제가 정말 이분을 진짜 엄마로 여기고 대했는지...
왜 더 잘하지 못했는지,
왜 사랑하고 고맙단 말을
매일 매일 해드리진 못했는지..
형편 어렵고 애가 셋이라
병원에 얼굴도 안비치던 형님..
형님이 돌보신다 해도 사양하고
제가 했어야 당연한 일인데,
왜 엄한 형님을 미워했는지..
말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사무치고
후회되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밤 11시쯤,,
소변보셨나 확인 하려고 이불속에 손 넣는데
갑자기 제 손에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 주시더군요.
"이게 뭐에요?" 했더니 소근소근 귓속말로
"아침에~ 옆에 할매 가고 침대밑에 있드라~
아무도 몰래 니 맛있는거 사묵어래이~"
하시는데 생각해보니
점심때쯤 큰아주버님도 왔다 가셨고,
첫째, 둘째 시누도 다녀갔고 남편도 퇴근해서
"할머니~ 잘 있으셨어요~?"
(자식들 몰라보셔서 언젠가부터 그리 부릅니다)
인사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침 7시에
퇴원한 할머니가 떨어트린 돈을 주으시곤
당신 자식들에겐 안주시고
갖고 계시다가 저에게 주신거였어요.
그리곤 그날 새벽
화장실 다녀왔다 느낌이 이상해
어머님 코에 손을 대보니 돌아가셨더군요....

장례 치르는 동안 제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제가
울다 울다 졸도를 세번 하고 누워있느라
어머님 가시는 길에도 게으름을 피웠네요...

어머님을 닮아 시집살이가 뭔지
구경도 안시킨 시아주버님과 시누이 셋.
그리고 남편과 저..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 위로하며,
어머님 안슬퍼하시게
우리 우애좋게 잘살자 약속하며
그렇게 어머님 보내드렸어요..

오늘이 꼭 시어머님 가신지 150일 째입니다..
어머님께서 매일 저 좋아하는 초콜렛,
사탕을 사들고 오시던 까만 비닐봉지.
주변에 널리고 널린
까만 비닐봉지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님이 주신 꼬깃꼬깃한 만원짜리를
배게 밑에 넣어두고..
매일 어머님 꿈에 나오시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해드리려 준비하며 잠듭니다.

다시 태어나면
처음부터 어머님 딸로 태어나길 바라는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부디 저희 어머님 좋은곳으로 가시길..
다음 생에는 평생 고생 안하고
평생 남편 사랑 듬뿍 받으며
살으시길 기도 해주세요.




우리는 최후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지지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신화를 넘어서

그가 지키고 키우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 따뜻한 정원
글쓴이 : 나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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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 은 천 국
글쓴이 : 작은천국 원글보기
메모 :
[스크랩]노무현전대통령님의 연설 기본 폴더  삭제
2009/05/23 22:56

이 연설을 수십번 보았어요
볼때마다 감동의 눈물만 주르르~~~

출처 : 강태공
글쓴이 : 강태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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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무현과 3대 위기 극복 구상했었다"

 
[오마이뉴스 김당 기자]
▲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29일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고 있다.
ⓒ 연합뉴스 조보희

인간의 감성을 표출하고 전달하는 데 분노와 눈물만큼 효과적인 매개체는 없다. 대중은 자신들이 화가 날 때 함께 분노하고, 자신들이 슬퍼할 때 함께 눈물을 흘리는 정치인의 인간적 모습에 감응한다. 그런 점에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감성의 정치인'이다.


2002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그는 자신을 연대후보로 선출한 개혁국민정당 문성근의 지지연설을 들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열렬한 지지자였던 문성근의 감동적인 연설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대선후보가 되기까지의 간난(艱難)과 신고(辛苦)가 그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그 장면은 나중에 대선 정치광고로 만들어져 유권자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곧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라크에 주둔한 한국군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병사들을 만나서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퇴임을 앞두고 '노사모' 회원들을 청와대 녹지원에 초청해서도 눈물을 뿌렸다. 그리고 그의 서거 이후 많은 사람들은 '친구 같은 서민 대통령'을 잃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노무현은 감성의 정치인, 김대중은 이성의 정치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감성의 정치인이라면,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이성의 정치인'이다. DJ는 1987년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처음으로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했다. 그러나 DJ는 서민이 아니었고 서민이 될 수도 없었다. 그는 서민들과 공명(共鳴)하기보다는 서민을 위한 정치에 본분을 두었다.


그의 대척점에 그를 영원한 경쟁자로 여겼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있다. 두 사람은 30년 민주화 동지이자 경쟁자였다. 그래서 DJ와 YS를 비교한 말과 글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박지원 의원의 이런 평보다 더 적확한 '촌철살인'은 보지 못했다.


"YS는 한 번에 180도를 바꾼다. DJ는 논리적이어서 하루에 1도씩 바뀐다."


▲ 오열하는 DJ 87년 당시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처음 참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 영령들 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런 DJ가 노무현의 주검 앞에서 오열했다. DJ가 대중 앞에서 펑펑 운 것은 1987년 5.18 국립묘지(당시는 망월동 공동묘지 5.18묘역)를 참배해 통한의 눈물을 흘린 이후 처음이다(19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가 7년만에 광주 영령들 앞에 섰으니 어찌 오열하지 않을 수 있으랴).


DJ는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부인 이희호씨와 함께 헌화와 분향을 마친 뒤 유족에게 다가가 권양숙씨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오열했다. 이에 영결식 내내 슬픔을 억누르던 권씨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 내외, 그리고 한명숙 공동장의위원장도 함께 일어나 눈물을 흘렸다. 앞서 헌화한 이명박(MB) 대통령이 인사할 때 유족들은 앉은 채로 외면했다.


무엇이 노구의 전직 대통령을 펑펑 울게 했을까?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영결식에 참석한 노(老) 대통령은 영결식 내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열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 오열의 정체는 뭘까? 무엇이 노구의 전직 대통령을 펑펑 울게 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DJ의 분신인 박지원 의원은 알 것 같았다. 2일 박 의원에게 물었다.


- 김 전 대통령이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는 것을 봤다. 지켜본 소감이 어떤가.

"영결식장에서 오열하시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어제도 대통령님과 같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관련)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 본 것과 대화 내용을 토대로 모레 대학 강연 때 얘기하려고 한다."


박 의원은 오는 4일 목포대 경영대학원에서 '노무현의 죽음과 김대중의 슬픔, 민주정부 10년의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주제로 특강을 할 예정이다.


- DJ가 그처럼 오열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왜 오열했는가.

"DJ 대통령께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첫째, 민주주의가 5공과 유신으로 회귀하는 것 둘째, 서민경제와 소외계층 및 중소기업이 도탄에 빠진 것 셋째, 남북관계가 위기에 처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DJ 대통령께서는 민주정부 10년을 이끈 전직 대통령으로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 세 가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구상'을 했다는 것을 (DJ와) 대화할 때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서거하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고, 저와 대화할 때도 '날개 한 쪽이 뜯겨 없어졌다'고 한 것이다."


DJ "내 몸의 반이 무너지고 날개 한 쪽이 뜯겨 없어졌다"


DJ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23일 "평생 민주화 동지를 잃었다"며 "민주정권 10년을 같이했던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애통해했다. 그리고 유족과 한명숙 장례위원장의 요청에 따라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려고 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자, 5월 28일 서울역 분향소에서 조문을 한 뒤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와 환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국민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진 마음이 앞으로 민주주의, 좋은 경제, 남북관계 화해 등 노 대통령이 추진하던 3대 정책에 발맞추어 국민이 나아갈 것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노무현과 김대중이 앞장서서 해왔고, 남북관계도 그랬다. 경제도 내가 외환보유고 1400억불을 노 대통령에게 넘겨줬다. (내가 정부를) 처음 맡을 때는 (외환보유고가) 37억불이었다. 노 대통령도 1200억불을 보태 다음 정부에 2600억불을 넘겨줬다. (그것이 없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세계적인 금융위기 앞에서 차입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박지원 의원은 기자들이 DJ와 노무현, 그리고 MB 정부의 국정 운용의 다른 점을 묻자 "(조각 당시) DJ는 정치인과 교수-시민단체 그리고 관료를 3분해 중용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시민사회단체에 치중했고, MB는 교수집단을 중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인은 현실적이고, 시민사회단체와 교수는 이상적이고, 공무원은 안정을 중시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DJ가 현실에 발을 디딘 이상주의자라면, 노무현은 이상에 발을 디딘 현실주의자이다.


DJ가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을 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진보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던 것처럼, 김 전 대통령은 현실에서 민주주의 후퇴와 3대 위기 극복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노 전 대통령과 연대를 구상했던 것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몸의 절반 혹은 날개 한 쪽을 잃은 아픔과 슬픔 말고도, 위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바로 그 '연대의 상실감'이 오열로 나타난 것이다.

 

경찰이 덕수궁 앞 분향소를 강제 철거한 뒤 그냥 그 자리에서 영정만 새로 모시고 진행된 조문, 저는 되도록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 데 화가나서 저도 이 자리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영정이 모셔진 단상에 기대진 굵은 몽둥이 같은 나무 뿌리

                     저게 뭐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칡'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생전에 칡을 좋아하셨답니다. 참 어떻게 그런것 까지 아시는 지..어느 분께서 칡을 놓고 가셨습니다.

 

 

담배도 아래 화면의 이 담배를 좋아하셨답니다. 저는 담배를 끊어서 담배 이름을 잘 모르겠는 데 '무슨 나인'이라는 담배랍니다. 이 담배 다음으로는 '디스'라는 담배를 좋아하셨다는 군요. 어떻게 그런 걸 알고 노 대통령이 좋아하는 것들만 가져 오시는 지 참 놀랍습니다.

 

 

          어느 여성 분이 정성껏 바치신 노란 색 장미 꽃

                  아름다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노란 풍선이 곱게 달린 국화!!

 

 

 

 

종이학

 

 

              노대통령이 쓴 책 - 여보 나 좀 도와 줘!!

 

 

      노 대통령께서 이 아름다운 마음들을 잘 지켜주실 것입니다. 

 

 

출처 : moonsoon씨네 블로그
글쓴이 : 문순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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