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특집 (낚시춘추 2016년 4월호에서 발췌)
서찬수, 갓낚시의 별이 지다
허만갑 기자
갓낚시를 창안한 붕어낚시인 서찬수씨가 지난 2월 16일 새벽에 간암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54세.
경남 창원시 상복공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영결식에는 장녀 서수정씨, 동생 서인수씨를 비롯한 유가족과 조객 수십 명이 참석했다. 고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경남 사천시 서포면의 한적한 소류지에 뿌려졌다.
서찬수씨는 마산에서 태어나 경남 지역 소류지를 무대로 갓낚시를 정립하였고 잡지와 방송을 통해 그의 낚시철학과 기법을 전파하며 많은 낚시인들에게 교감을 주었다.
고인은 작년 11월에야 암세포가 손쓸 수 없을 만큼 퍼진 것을 알았고 그 후 창녕군 부곡면의 저수지 위에 작은 집을 짓고 몇몇 조우들과 조용히 교유하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요절에 가까운 그의 죽음은 많은 낚시인들에게 충격을 던졌고 비보를 접한 낚시인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빈소를 찾았다. 송귀섭, 박현철, 윤기한, 배성규, 성제현, 김진태, 김중석, 김진우, 임연식, 이왕수, 이택상씨 등 유명 낚시인들과 평소 고인과 친분이 깊었던 부산경남 낚시인들이 빈소를 가득 메웠다. 서찬수씨의 팬클럽인 천지어인 회원들이 상주하며 빈소를 지켰다. 서찬수씨가 출연했던 FTV에선 추모 프로그램을 특별 편성해 방영했다.
천지어인의 조계삼 회장은 “낚시계의 큰 별 허송(虛送) 서찬수님을 보내며 우리 모두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언제 보아도 동네의 형님 같이 격 없고 수수하기만 했던 허송님과 또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비보랍니까. 허송님은 떠나셨지만 천지어인은 변함없이 갓낚시를 계승하고 허송님의 친환경적 낚시이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첫 만남
내가 서찬수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93년 5월 경남 창녕군 길곡면의 하내지 취재였다.
나는 낚시춘추에 입사한 지 갓 1년 된 신입기자였고, 서찬수씨는 그날 동행한 마산 제일낚시 회원들 중 가장 젊었다.
하지만 막내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특별대우를 받는 듯 제일낚시 임용길 사장은 서찬수씨를 가장 좋은 최상류 갈대밭에 앉혔다.
그날 밤 서찬수씨만 30cm 붕어를 낚았고 나머지는 잔챙이 구경에 그쳤다.
그러나 나는 포인트가 좋아서 대어를 잡았을 뿐이라 여겼고 그의 낚시실력이 뛰어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다만 그의 낚싯대는 눈길을 끌었는데 대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시마노 주문봉 중층대 세트를 구비해 새우낚시를 하고 있었다. ‘돈이 많구나, 국산대도 좋은 게 많은데 펴고 접기도 불편한 일본 꽂기대로 새우낚시를 하다니, 별 사람도 다 있구나’ 싶었다.
나는 제일낚시 임용길 사장과 취재를 했고 서찬수씨는 별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와 나눈 대화는 기억나는 게 없다.
서찬수씨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6년 후, 99년 3월 마산 회성동의 한 지하다방에서였다. 꽤 비싼 아르마니 니트를 입고 있었지만 행색은 전에 비해 남루해보였다. ‘비디오사업을 크게 해서 잘 나갔는데 밑에서 일하던 놈이 돈을 들고 튄 데다가 보증까지 잘못 서서 쫄딱 망하고 이혼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임용길씨에게서 들은 터라 그리 보였는지도 모른다. 임용길씨는 “서찬수가 무일푼이 된 뒤 소일거리로 찌를 만들고 있는데 솜씨가 좋다.
찌 팔아서 용돈이라도 벌 수 있게 기사로 실어서 좀 띄워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서찬수씨와 나는 다방을 나와 창원시 팔용동에 있는 그의 반지하 사무실로 갔다. 찌공방과 침실, 주방까지 있는 20평 남짓한 사무실이었는데 간판 이름이 웃겼다. ‘허송세월’
“참 미친놈처럼 정신없이 살았는데 이제 와서 다 털어먹고 뒤돌아보니 낚시는 허송세월이 맞구나 싶어서 이리 지었네요.”
나는 사무실 이름이 좋았다. 그날 밤 우리는 낚시 얘기로 밤을 새웠다.
서찬수씨는 안 해본 낚시가 없었다. 민물낚시만 한 게 아니라 거문도, 추자도, 태도 등 유명한 섬은 다 다녔고 갯바위낚시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낚시행각은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겨울에 전라도로 붕어낚시를 가면 서너 명이 갹출해서 봉고차를 빌리고 기사까지 채용했어요.
일행 중에서 운전을 하면 그 사람은 낚시를 못하잖아요. 그렇게 한 번 나가면 최하 보름에서 한 달씩 있다 왔어요.
한 번은 낚시 갔다 집에 오니까 방에서 모르는 여자가 나와요. 나도 놀라고 그 여자도 놀랐죠.
알고 보니 와이프가 화가 나서 방을 내놓고 이사를 가버린 겁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알 수가 있나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저기 전화해보니까 그래도 아주 헤어질 마음은 아니었던지 우리 집(시댁)에 와 있더라구요. 그래서 안심하고 그 길로 또 낚시를 갔죠.”
그날부터 나는 서찬수씨와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홀아비와 노총각의 딱 떨어지는 궁합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부산과 울산의 낚시인들을 창원의 허송세월로 불러들였다. 그러면 서찬수씨는 그들을 비장의 소류지로 데리고 가서 손맛폭탄을 안겨주었다.
나는 그 현장을 카메라로 찍어서 낚시잡지에 실었다. 잡지를 본 낚시인들까지 허송세월을 찾기 시작했다.
서찬수씨의 억새찌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지만 끼니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낚시인들이 밥도 사고 술도 샀다. 마산창원에 사는 서찬수씨의 친구와 선후배들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언제나 놀라웠던 서찬수의 낚시
서찬수씨는 낚시터에 가면 먼저 자리를 잡는 법이 없었다. 남들에게 포인트를 다 양보하고 맨 마지막으로 대를 폈다.
욕심을 내는 사람에겐 많이 걷는 자리나 생자리를 권했고, 휴식을 원하는 사람에겐 편한 포인트를 권했다.
그러나 대부분 각자 알아서 포인트를 선정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서찬수씨가 앉는 포인트는 아무도 앉으려 하지 않는 곳이었다.
낚싯대를 두 대도 펴기 힘든 옹색한 자리, 의자를 놓을 수 없는 비탈에 앉아 낚시를 하는데 대를 펴는 모양새도 볼품없었다. 받침대와 뒤꽂이는 높이가 제각각이고 수면의 찌 높이도 들쑥날쑥한데다 낚싯대라고 여남은 개 있는 것이 메이커가 다 달라서(주문봉 세트는 팔아치운 듯했다.) 정돈된 모양새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침에 보면 그의 조과가 늘 1등이었다. 그러니 모두 놀랄 수밖에!
서찬수씨는 낚시를 오래 하지도 않았다. 앉아 있는 시간보다 랜턴을 켜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몰아치기의 명수였다. 함양 덕암지에서는 자정이 넘도록 한 마리도 못 낚고 있다가 새벽에만 50마리를 낚아 올렸다.
그는 또 물소리를 안 내고 낚는 재주가 있었다.
천지어인 회원 이성호씨는 “내가 신나게 낚을 동안 찬수 형님은 낚는 기척이 전혀 없어서 속으로 기고만장했는데 날이 밝아보니 마릿수도 나보다 많고 씨알은 평균 한 치가 더 굵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한 적 있다.
서찬수씨는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의 낚시를 배우고자 오는 사람들에게도 먼저 물어보지 않는 한 설명하지 않았다. 서찬수씨는 잘난 체하는 사람을 싫어했고 낚시를 너무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도 싫어했다.
그에게 낚시는 놀이였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즐기는 한 형태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었고 허송세월을 낚시인의 사랑방, 세상사에서 격리된 공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갓낚시의 전파
나는 2년 동안 서찬수씨와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그의 독특한 낚시스타일을 관찰하였고 결국은 매료되었다.
서찬수의 낚시는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었는데, 낮에 보면 바닥이 보일 만큼 얕은 수심의 가장자리를 노린다는 것과 파라솔, 받침틀은 물론 의자까지 제거한 채 인기척을 없앤 낚시를 한다는 것이었다. ‘얕은 물가’와 ‘무인기척’의 키워드로 다시 접근한 새우낚시는 놀라운 조과를 안겨주었다.
그때까지 새우낚시는 마릿수가 없는 지루한 기다림으로 각인되어 있었으나 갓낚시는 새우를 쓰면서도 떡밥보다 더 많은 마릿수를 낚았다. 그리고 월척붕어가 너무 쉽게 낚였다. 나는 베드로가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것처럼 이 신기한 낚시의 전도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2001년 봄, 나는 서찬수씨의 낚시에 ‘갓낚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진주 이반성면 포실지 제방에서 갓낚시로 월척을 낚는 현장을 찍어서 월간낚시 5월호에 소개했다.
나는 그때 독자들로부터 욕먹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해괴한 걸 낚시라고 소개했느냐’는 항의가 뒤따를 줄 알았다. 그런데 독자들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갔다. 걸려온 전화는 “따라 해보니 정말 월척이 낚이더라”는 칭찬 일색이었다.
5월호부터 11월호까지 갓낚시 현장화보는 월간낚시 지면을 장식했고 서찬수는 대물낚시의 새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기사를 보고 전국에서 낚시인들이 허송세월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갓낚시 창시자라 불렀다.
그러면 서찬수씨는 쑥스러워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내가 그의 소매를 억지로 잡아끌지 않았으면 갓낚시는 아직도 경남의 깊은 숲속에 묻혀있을 거라고.
허송세월의 하루
허송세월의 하루는 분주했다. 밤낚시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오전 10~11시.
잠시 소파에 누워 눈 붙일 시간도 없이 오후 2~3시면 새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사람들이 올 때마다 배달커피를 시키는 바람에 허송세월은 팔용동 다방들의 최대고객이 되었다. 오후 4~5시면 손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출조에 나섰다. 주말에는 두세 팀이 동시에 찾아와 소류지를 여러 군데로 나누어 나갔는데 낚시인들은 서로 서찬수씨와 동행하고 싶어 했다.
서찬수씨가 골라주는 저수지들은 죄다 A급이었지만, 직접 동행하면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
그것은 2차, 3차, 4차로 월척을 낚을 때까지 이어지는 소류지 순례였다. 붕어낚시 황금시즌인 봄에는 대박조황을 찾아서 하룻밤에 저수지 7곳을 돈 적도 있다. 대 펴고 30분 안에 입질이 없으면 “철수” 또는 “이동”이었다.
함안군에서 초저녁 낚시를 하고 진주시에서 야참을 먹고 의령군에서 새벽손맛을 보는 날이 허다했다.
그것은 서찬수씨가 각 저수지별로 붕어가 잘 낚이는 시간대를 정확히 꿰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몽유병적 방랑에 적응하지 못하고 “못 낚아도 좋으니 좀 진득하게 앉아있자”는 낚시인들이 많았지만 서찬수씨는 “붕어를 낚는 게 아니고 저수지를 낚는 과정”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서찬수씨는 마음속에 짚이는 소류지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낚시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 결과가 확인되면 또 다른 소류지로 탐사를 떠났다. 오늘 많이 낚았다고 내일 또 그곳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낚시인들은 서찬수씨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그 무궁무진한 소류지 정보의 원천을 궁금해 했다. 울산의 정모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서 회장(낚시인들은 서찬수씨를 이렇게 불렀다.)이 죽고 나면 이 저수지들이 다 묻힐 텐데 그게 걱정이다.”
허송세월에는 근심이 없었다. 날마다 먹고 자고 낚시만 하는데 걱정이 있을 리 없다.
오직 고민이 있다면 오늘밤 진한 손맛을 보기 위해 또 어느 못으로 가나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경남에는 소류지낚시가 확산되기 전이어서 아무데나 가도 무주공산이요 월척밭이었다.
허송세월에는 다툼이 없었다. 낚시점이 아니어서 금전이 오갈 일이 없고 낚시회도 아니어서 위계질서니 정출이니 하는 문제로 의견이 갈릴 일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서찬수를 중심으로 모였으되 각자 낚시를 즐길 뿐이었고, 모든 결정은 서찬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당장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했다. 서찬수씨는 낚시, 조과, 손맛보다 낚시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날그날 모인 낚시인들 중 오늘은 이 사람이 밥을 사면 내일은 저 사람이 미끼를 샀다.
월척을 낚으면 커피를 사고 4짜를 낚으면 노래방을 쏘았다. 허송세월에 오면 혼자서는 낚시를 즐길 수 없음을 누구나 깨달았다.
나는 낚시인에게 파라다이스가 있다면 그곳이 허송세월일 것이라 생각했다.
허송세월은 음습한 팔용동 반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남의 저수지를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있었고 산속 소류지 곳곳에 있었다.
아침에는 꽃들이, 밤에는 노루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허송세월을 찾는 모든 낚시인들이 이 나태함과 비생산적인 분위기에 중독되었다. 이삼일 예정으로 왔다가 열흘 넘게 머물다 가는 이들이 많았다.
낚시방송의 스타로
“사람들이 찾아올 때 낚시점을 차려서 돈을 벌어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서찬수씨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금전관계로 얽매이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나 2005년 겨울에 서찬수씨는 창원시내를 벗어난 북면 화천리에 ‘세월낚시’란 상호의 낚시점을 차렸다. 한사코 낚시점은 않겠다던 그가 왜 생각을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이가 드니까 노후가 걱정되었을 수도 있고, 이혼한 뒤 전 부인과 함께 살던 딸의 학비를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당시 만나던 여자와 재혼하려 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서찬수가 낚시점을 개업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우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농약가게 옆 10평 남짓한 공간에 소품 몇 개 걸어놓은 초라한 가게였지만 매출은 큰 낚시점 못지않았다.
특히 낚시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손님은 더 늘었다. 서찬수씨는 꽤 벌었고 딸과 전 부인에게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까지 부쳐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전처럼 서찬수씨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조선일보에서 발간하던 월간낚시가 폐간되고 주간조선으로 옮기면서 낚시기자 생활을 그만 둬야 했기 때문이다. 1년 후 낚시춘추의 편집장을 맡게 되었지만 일선기자가 아니라서 예전처럼 창원에 내려가 며칠씩 머물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그동안 월간낚시에 연재했던 갓낚시 기사들을 모아서 단행본을 제작했다. 그리고 서찬수씨가 초보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을 한 Q&A를 붙여서 <월척 쉽게 낚는 책-서찬수의 갓낚시>를 출간했다.
서찬수씨가 낚시방송에 처음 출연한 시기가 2008년인지 2010년인지 잘 모르겠다.
FTV <서찬수의 갓낚시> <월척특급>에 출연하기 전에 FS-TV에도 몇 번 등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방송출연은 서찬수를 전국구 스타로 부각시켰다. 2009년에 서찬수 팬클럽 ‘천지어인’이 결성되었고 1년 안에 전국 5개 지부를 가진 클럽으로 성장했다.
사실 ‘서찬수가 TV에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스타탄생을 확신했다. 그의 독특한 캐릭터와 불세출의 낚시실력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과연 서찬수는 출연하자마자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시청자들은 그의 촌스런 패션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매력으로 받아들였다. 메기를 낚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구워먹고 의자를 들어 비를 가린 채 쭈그리고 앉아 낚시를 하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희대의 캐릭터에 급관심을 보였다.
낚시인들은 정형화된 방송 출연자들과 완전히 다른 이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캐릭터, 첫 인상은 어설퍼 보이는데 고기를 너무 잘 낚아! 도시촌놈들에게 말없이 한 수 보여주는 노련한 동네형의 이미지로 서찬수씨는 확고한 팬층을 잡았다.
요즘 사람들은 세련된 주류보다 거칠지만 진솔한 비주류 문화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는데 서찬수야말로 가장 유쾌한 비주류의 상징이 되었다.
마지막 만남
1월 3일이 내가 서찬수씨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혼자 가기가 두려워 부산의 후배 김종호씨와 같이 갔다. 시한부 선고를 받아놓은 그를 보는 것이 겁이 났다.
창녕 부곡면의 한 저수지 위에 작은 집을 지어놓고 서찬수씨는 노모와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현관에서 모친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온 걸 알았을 것이다.
방에 들어가니 한쪽 벽 모퉁이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사내가 기대어 앉아 우리를 쳐다보았다.
몸은 어떠냐, 괜찮다, 통증은 없느냐, 없다, 음식은 잘 먹느냐, 잘 먹는다… 몇 마디 나누고 슬그머니 돌아누운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도 울었다. 우리가 함께한 23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서찬수씨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우리는 옛날에 셋이서 월척을 타작했던 저수지들을 하나씩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국도 간여에서 상어를 걸어 발만 동동 구르던 얘기도 나왔다. 종호는 대마도 야영낚시를 가자며 열을 올렸다.
“봄 되면 또 낚시 가야죠.”
“가야지! … 남해도에 진짜 가야 할 곳이 한 군데 있는데.”
오후가 되자 천지어인의 조계삼 회장과 김주수 회원이 찾아왔다. 이날따라 볕이 너무 좋아서 저수지 제방까지 한 바퀴 걸었다.
철모르는 매화가 활짝 피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테라스에서 오리고기를 구워 다함께 나눠먹었다.
병은 의사가 진단한 대로 에누리 없이 진행되었다. 1월 21일 경남 양산의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식이 왔고, 설 전에 병문안을 갔던 광주 월산낚시 나광진씨(서찬수씨와 함께 월척특급을 진행하였다.)가 ‘사람을 못 알아보더라’고 했다.
2월 16일 새벽 3시, 서찬수씨는 우리 곁을 떠났다.
서찬수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서찬수는 잊을 수 없는 친구, 대체할 수 없는 스타로 남을 것이다.
그보다 더 붕어를 잘 낚고 방송을 더 잘하는 낚시인은 있을지 몰라도 그만큼 꾸밈없는 웃음과 큰 울림을 주는 낚시인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연예인과 달리 낚시라는 전문분야의 스타는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스타 한 사람의 죽음은 낚시산업계로서도 큰 손실이다.
서찬수를 보고 낚시를 시작하고 그의 방송을 보고 출조할 마음을 낸 낚시인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서찬수가 남기고 간 의미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모두가 갓낚시의 영향을 받았다.
아주 얕은 수심, 아주 가까운 연안까지 노리는 시도는 서찬수 이전에는 없었다. 물가에서 멀찌감치 떨어지거나 제방 위에 올라앉아 하는 낚시도 전에는 없었다.
살아생전 그가 남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도 나를 툭툭 찌른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낚시, 하지 마라. 인생은 짧고 낚시할 날은 적은데 진짜 해보고 싶은 낚시를 해라.
그러다보면 시행착오도 있지만 그게 낚시 아이가! 낚일지 안 낚일지 몰라야 낚시지, 다 알고 하는 낚시가 그게 낚시야?”
서찬수씨의 영정.
생전의 서찬수씨.
FTV <월척특급>을 통해 보여준 그의 친근한 매력은 뛰어난 낚시실력과 어우러져 많은 팬들을 낳았다.(사진 천지어인)
낚시춘추 93년 6월호에 실린 서찬수씨의 모습. 당시 31세의 앳된(?) 얼굴로 나와 처음 만났다.
천지어인 회원들과 함께 하던 건강한 서찬수씨의 모습.
따가운 여름볕을 피해 나무그늘에 기대어 앉은 서찬수씨.
자신의 낚시인생을 '허송세월'이라 부르며 세평에 초연했던 그는 낚시보다 낚시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사진 천지어인)
창원시 북면에 있던 세월낚시. 이름처럼 이제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고인의 따님이 아버지가 즐겨 찾던 저수지 물가에 유해를 뿌리고 있다.
죽어서도 물가를 떠나기 싫었는지 "한적한 저수지에 내 뼈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